3850㎞. 한반도 동해안의 도시 강릉과 태국 수도 방콕 사이의 물리적 거리다.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지닌 두 도시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함께 만났다. 파마리서치문화재단(박소희 큐레이터)이 기획하고 방콕 쿤스트할레가 공동 개최한 국제협력전시 《경계에서 함께 보기(Watching Together at the Boundary)》가 15일 방콕 쿤스트할레(Bangkok Kunsthalle)에서 현지 관계자들과 방콕 시민, 교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막했다.

오는 8월 9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을 통해 제작·발표된 커미션 작품들을 방콕 쿤스트할레의 공간적 맥락에 맞춰 새롭게 재구성한 무빙 이미지를 기반으로 구성됐다. 고등어, 이양희, 아라야 라스잠리안숙, 정연두, 홍이현숙 5인의 작가가 참여한다.
이날 개막식에서 파마리서치문화재단 박필현 이사장은 "이번 전시는 해외에서 열리는 단발성 전시를 넘어, GIAF의 국제적 역할을 연속성 있게 확장하려는 재단의 장기 프로젝트 방향성을 보여주는 첫 단계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하고 “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 기관인 방콕 쿤스트할레와의 연대를 시작으로, 향후 강릉 ‘인온’을 중심으로 다각적인 국제 협력망을 구축해 지역과 세계를 잇는 독보적인 글로벌 문화 허브를 구축하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인 박소희 파마리서치문화재단 상임이사는 “이번 전시는 강릉 ‘인온’과 태국 ‘방콕 쿤스트할레’를 잇는 글로벌 문화 가교의 출발점이며, 앞으로 단발성 행사를 넘어 유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국제 교류의 구조를 견고히 다져나갈 것”이라고 전시의 기획 의도를 강조했다.
이어 CP그룹 특별고문이자 카오야이 아트 재단 설립자인 마리사 치아라바논(Marisa Chearavanont) 은 "예술은 우리에게 치유와 사랑, 긍정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다"며 "두 나라, 두 도시를 잇는 이번 전시의 제목은 '경계에서 함께 보기'이지만 더 깊게는 '경계없이 함께 보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가 열리는 방콕 쿤스트할레는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이다. 1970년대에 지어진 건물 3개 동으로 구성됐으며 특히 가장 높은 7층 규모의 콘크리트 건물인 B동은 과거 교과서 인쇄공장이 있던 곳이다. 2001년 화재가 난 이후 방치됐던 곳을 카오야이 아트재단이 인수해 2024년 1월 쿤스트할레로 새롭게 문을 열면서 방콕 현대미술이 새롭게 에너지를 얻으며 확장하는 핵심 거점이 되고 있다.
방콕 쿤스트할레의 스테파노 라볼리 판세라 (Stefano Rabolli Pansera) 예술감독은 "쿤스트할레의 장소적 기억과 산불을 비롯한 자연재해를 겪은 강릉의 경험이 지닌 공통점은 이번 전시를 공동기획하는 추동력이 됐지만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두 도시가 축적해온 재생과 회복의 감각을 동시대 미술의 언어 안에서 다시 연결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경계에서 함께 보기》는 강릉단오제와 물을 뿌리며 한 해의 액운을 씻고 새 시작을 축복하는 태국의 전통 축제 송크란이 공통적으로 지닌 공동체적 회복의 감각에 주목한다. 두 축제는 서로 다른 지역의 전통이지만, 공동체가 함께 모여 안녕을 기원하고 삶의 리듬을 회복해 왔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인 박소희 파마리서치문화재단 상임이사는 “이번 전시는 GIAF가 축적해 온 강릉의 장소성과 서사를 방콕이라는 또 다른 도시의 시간 안에서 다시 읽어보는 과정”이라며, “강릉단오제와 송크란이 공유하는 공동체적 회복의 감각을 바탕으로, 예술을 매개로 한 지속적인 국제 교류의 구조를 만들어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날 개막식에서는 특별 프로그램으로 전통연희집단 '푸너리'는 강릉단오굿의 악,가,무, 극을 바탕으로 굿이 지닌 원초적 생명력과 신명을 오늘의 무대 언어로 새롭게 풀어낸 오프닝 퍼포먼스를 펼쳐보였다. 푸너리는 동해안지역의 굿에서 처음 나오는 장단을 뜻한다. 연희집단 '푸너리'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자 국가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 무격부 전승자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전문 예술단체다. 김운석 등 4명의 악사는 이날 방콕 쿤스트할레의 공간적 맥락에 맞춰 관객 참여형으로 기획한 오프닝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관객들이 강릉단오제의 상징적 제의물인 '지화(紙花)'를 직접 손에 들고 퍼포먼스의 일부가 되는 장관을 연출했다. 붉은색, 흰색, 노란색 지화를 손에 든 관객들과 예술가들은 '경계 없이' 함께 호흡하는 교감의 장 속에서 푸너리가 뿜어낸 역동적인 음악과 제의적 리듬, 신명 나는 몸짓으로 방콕 쿤스트할레 공간을 가득 채우며 관객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푸너리는 산업유산의 흔적은 그대로 담고 있는 콘스트할레의 공간을 돌며 신을 맞이하고(영신), 신과 함께 즐기고(오신), 신을 보내는(송신) 과정을 압축해 강릉 단오굿의 신명과 공동체적 감각을 관객들과 나눴다. 푸너리를 이끄는 김운석 악사는 " 영신-오신-송신으로 구성된 단오굿의 과정을 30분에 압축해 표현하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쿤스트할레라는 공간이 지닌 스토리가 강릉과 통하는 것 같았고 공간의 울림이 너무 좋아 신명나게 연주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의 핵심 개념인 ‘함께 보기(Watching Together)’는 단순한 집합적 관람을 넘어, 관객이 한 공간에서 시간을 공유하고 머무르는 경험 자체를 회복과 환대의 실천으로 제안한다. 참여 작가들의 작품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경계와 회복, 존재와 공동체의 감각을 다룬다.


정연두(b. 1969)작가는 지난 해 GIAF에서 선보인 〈싱코페이션 #5〉(2025)를 방콕 쿤스트할레 공간에 맞게 재편집해 보여준다. 작품은 강릉단오제의 풍경을 통해 인간의 염원과 불가항력적인 자연이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들리지 않는 피아노와 침묵, 리듬과 발효, 기도와 같은 제의적 행위들을 병치하며 강릉의 시간과 공동체의 감각을 드러낸다. 작품은 정상적인 피아노와 현을 제거해 소리가 나지 않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 재해에서 회복한 강릉의 논에 모를 심고 수확해 얻은 쌀을 모아서 빚은 술이 발효하고, 단오굿의 제의적 진행 과정을 보여주는 3개의 다른 영상이 한 화면에서 마치 엇박자 속에 하모니를 이루듯 흘러나온다. 피아노 연주는 독일 훔볼트박물관에서 발견된 1차대전 당시 러시아군으로 싸우다 독일군의 포로가 된 고려인들의 육성이 담긴 레코드를 토대로 작곡된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디아스포라'를 기반으로 한다.
개막식에 이어 진행된 작가-큐레이터 토크에서 정 작가는 "강릉의 산불을 보면서 자연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위기를 넘기고 단오제를 맞아 축제를 벌이는 것을 보고 많은 힘을 얻었다"면서 "강제이주된 뒤 척박한 사막지대에서 물길을 만들고 논농사를 지어 곡창지대를 이룬 고려인의 이야기가 먼 나라의 일 같지만 예술을 통해 강릉 단오굿과 연결하고 대화를 나누게 한다는 데에서 싱코페이션 작업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홍이현숙(b. 1958)의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 강릉〉(2025)은 강릉 임영관 삼문, 칠사당 등 오래된 건물과 나무, 산, 바다가 퍼포머의 두드림에 반응하며 움직임을 이루는 작품이다. 작가는 ‘두드림’을 공간과 존재들을 연결하는 리듬이자 기도, 그리고 소환의 제의적 행위로 제시한다. 고등어(b. 1984)의 〈사각의 검정〉(2023)은 보편적 환대 속에서도 배제되어 온 이주민과 소수자의 서사를 이미지로 시각화하며, 경계에서의 환대가 무엇인지 질문한다. 태국 작가 아라야 라스잠리안숙(b. 1957)의 〈개들의 궁전〉(2022)은 개의 시점을 경유한 미시적 관찰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의 공존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양희(b. 1976)의 〈이양희 입춤〉(2020/2025)은 즉흥성과 기본기를 함께 지닌 전통춤의 핵심 형식인 입춤을 통해, 변화하는 시대를 수용하면서도 사라져가는 기술을 기록하고 전수하는 실천으로서 전통의 계승을 모색한다.
재단은 2027년 제4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27)에서 복합문화공간 ‘인온(INON, 가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전시를 선보인 후, 2028년 9월 인온의 공식 개관과 함께 방콕 쿤스트할레와의 장기 협력 관계를 심화할 예정이다. 향후 인온을 거점으로 방콕 쿤스트할레와의 협력 전시 및 한·태 작가 교환 프로그램 운영, 해외 주요 예술 기관과의 파트너십 확충 등을 연쇄적으로 추진하며 강릉을 국제적 문화예술의 허브로 확장시킬 계획이다.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은 글로벌 바이오기업 (주)파마리서치가 2018년 설립한 비영리재단으로 '재생'이라는 기업의 핵심 가치를 바탕으로 지역사회 공헌과 문화예술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강릉 기반 국제 문화계술행사인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을 기획, 지역성과 동시대성을 균형있게 담아낸 주제로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확장해 왔다. 국내외 영향력 있는 작가들을 초청해 강릉의 문화정체성을 알리고자 노암터널, 강릉역, 동부시장, 대관령 치유의 숲, 강릉 대도호부관아, 창포다리 등 유적지와 도시공원을 포함한 다양한 공간에서 전시 및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